44. 타인 지옥설
44.
타인 지옥설 [ 타인은 지옥이다, 아니다 ]
드디어 지긋지긋한 2021년을 떠나 보낸다. 애궂은 2021년만 원망하는 것 같지만 미운 것은 코로나 19이다. 이름이 19니까 이 징글징글한 바이러스는 3년째 아니 곧 4년째로 접어드는구나. 최근에 출현한 전파력은 크지만 치명률은 상대적으로 낮다는 변이 오미크론(ο·Omicron)이 부디 소멸의 징후이기를 바란다. 그리스 문자라고 해 봤자 기껏 알파, 델타, 감마 정도 아는 것이 전부였는데 덕분에 오미크론(15번째 알파벳이고, 코로나의 13번째 변이라고 함)까지 알게 되었다. 어쨌든 이제는 밖으로 나가고 싶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고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나고 싶다. 그렇다면 이제 ‘타인은 지옥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게 맞을까.
혹시 2018년에 연재가 시작되었던 인기 웹툰 <타인은 지옥이다> 또는 동명의 드라마를 기억하는가. 당시 웹툰의 인기가 엄청났고 드라마 또한 화제였는데 흑백이었던 웹툰과는 달리 컬러풀했던 드라마는 너무 자극적이어서 시청하기에 불편한 부분도 많았다. 제목만으로도 어필이 된다. 사실 이 제목 낯설지가 않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표현은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장 폴 사르트르(1905~1980)의 희곡<닫힌 방>에 나오는 대사이다. 그러니까 사르트르의 말인 것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를 추구하지만 실존을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하며 타인의 감시하는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태를 지옥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역시 실존주의란 난해하다.
코로나 19 전만 해도 ‘타인은 지옥이다’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많았다. 원치 않는 만남, 속박, 강제, 회식 등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데 코시국이 오래 가면서 우리는 슬슬 사람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타인은 지옥이 아니다’라고 말해도 좋을까. 이 말은 사르트르가 한 말의 부정문이다. 정확히 이 표현은 폴란드의 시인 아담 자가예프스키(1945~2021)의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이라는 시의 한 구절로 등장한다. 사실 ‘타인들은 지옥이 아니다’라는 말보다 이 시의 제목이 더 끌린다. 말이 나온 김에 그 시를 소개해 본다. 어디 타인이 왜 지옥이 아닌지 보자.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 아담 자가예프스키 /최성원, 이지원 옮김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
위안이 있다, 타인의
음악에서만, 타인의 시에서만.
타인들에게만 구원이 있다.
고독이 아편처럼 달콤하다 해도,
타인들은 지옥이 아니다,
꿈으로 깨끗이 씻긴 아침
그들의 이마를 바라보면.
나는 왜 어떤 단어를 쓸지 고민하는 것일까,
너라고 할지, 그라고 할지,
모든 그는 어떤 너의 배신자일 뿐인데,
그러나 그 대신
서늘한 대화가 충실히 기다리고 있는 건
타인의 시에서뿐이다.
역시 난해하다. 그런데 조금은 이해도 된다. 고국을 떠나 타향에서 살아가는 시인(혹자는 그를 ‘영원한 타인/이방인’이라고 함)에게 낯선 타인은 지옥이었을지 모른다. 아니면 어떤 이유에서든 자기 자신이 지옥? 그렇다면 자신은 스스로를 위로할 수 없으며 결국 위로는 외부로부터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 갑자기 낯선 시인의 고독에 공감이 된다. 위안은 모름지기 타인으로부터 받아야 제 맛이지. 따뜻한 눈빛과 따뜻한 손길과 함께 말이다.
타인들로 인해 피곤했던 그 시절에 우리는 ‘타인은 지옥이다’고 느꼈었고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나지 못하는 코시국에 우리는 ‘타인은 지옥이 아니다’고 느끼고 있다. 이 바이러스와 싸우는 동안 무수한 (사회)심리학적인 질문이 던져지고 있다. 그 이유와 원리가 어찌 되었던 앞으로도 우리는 이렇게 타인 지옥설을 긍정했다가 부정했다가… 이를 반복하며 살게 되겠지. 실존주의 철학자가 되었다가 실존주의 시인이 되었다가… 그런데 이런 무한반복은 얼마든지 좋다. 하지만 적어도 코로나 19가 가져다 준 이 ‘지옥’에서는 벗어나고 싶다. 이제 제발.
* 위에 소개한 시는 <타인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시집에 수록되어 있음. 시인 아담 자가예프스키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1945년에 폴란드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가족과 함께 폴란드에서 추방당했음. 고향상실과 독재정치는 그의 시 세계에 깊이 파고 들었다고 함. 그는 여러 문학상을 수상했고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자주 올랐던 유명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