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만성 알코올 중독자의 거짓 아닌 거짓말 [지어냈지만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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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 알코올 중독자의 거짓 아닌 거짓말
[ 지어냈지만 진실? ]
한때 ‘술 권하는 사회’라는 말은 한국의 음주문화를 대표하는 말이었다. 권하는데 안 마시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꽤 오랜 동안 한국사회는 술을 권하고 또 그에 응하고 그야말로 술에 관대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술 문화도 시대가 변함에 따라서 달라지고 있다. 술에 관한 짧은 사회학은 각설하고 지금 여기서는 만성 알코올 중독의 한 가지 특징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알코올과 같은 물질에 대한 중독은 ‘의존(dependency)’의 의미이다. 말 그대로 술에 의존하는 것인데 이것이 마음은 물론 몸에까지 적용된다. 그냥 술을 마시고 싶은 것이 아니고 몸이 술을 당긴다. 그렇다고 알코올 중독을 합리화할 수는 없고 다만 그 만큼 알코올 의존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몸에 술이 들어가야 취하는데 그 양이 갈수록 늘어간다. 이처럼 취하는 기준, 즉 역치가 높아진 것을 가리켜 술에 ‘내성(tolerance)’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주량은 점점 늘어가고 몸에 알코올이 없는 상태에서는 지독한 ‘금단(withdrawal)’현상을 겪는다. 금단을 알코올이 몸에서 빠져 나간 후에 생기는 여러가지 불쾌하고 힘든 증상들이다.
만성 알코올 중독자의 가족이나 지인들이 호소하는 많은 징후(sign) 중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 있다. 거짓말은 고의성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볼 때 어떤 만성 알코올 중독자의 거짓말은 엄밀하게 빠져 볼 때 거짓말이 아닐 수 있다. 그들은 일종의 기억장애를 겪으며 그 구멍 난 기억을 메우기 위해서 말을 지어내는 ‘작화증(confabulation)’을 나타내기도 한다. 폭음으로 인한 필름 끊김(black-out)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술을 마셨던 어제 밤 어느 시점 이후의 기억이 나지 않을 수 있음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자신이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안다. 이에 비해 어떤 알코올 중독자들은 자신이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르기도 한다.
이들은 바로 내측 측두엽과 시상 및 변연계 구조의 손상으로 기억장애를 보이는 코르샤코프 기억상실증(Korsakoff’s amnesia)을 겪는 것이다. 핵심은 알코올 자체보다는 티아민(vitamin B1)의 결핍에 있다. 티아민은 탄수화물 대사에 관여하여 섭취한 음식을 에너지로 바꿔 주는 역할은 하며 육류와 곡물, 달걀 등에 많다. 그런데 알코올 중독자들은 흔히 말하는 밥을 잘 챙겨 먹지 않으며 오로지 술만 많이 먹으려고 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만성 알코올 중독자들은 티아민 결핍이 많다. 티아민 결핍은 흔히 아는 각기병 외에도 신경계 질환을 일으킬 수 있다. 그 신경계 질환이 바로 기억장애이며 병이 오래 되어 깊어진 후에는 꾸며낸 이야기가 기이한 내용이어서 정신증을 의심케 한다. 그래서 이 병을 코르사코프정신병증이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이미 이 병에 걸린 만성 알코올 중독자들은 자신이 무엇을 기억하지 못하는 지를 모르며 구멍 난 기억에 이상한 생각들을 끼워 넣어 말하며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고 있다. 이들은 붙잡고 진실공방을 하는 것은 소용이 없고 상대방만 속이 터진다. 이처럼 상습적이고 과도한 음주는 알코올 중독을 일으킬 수 있고 만성 알코올 중독은 뇌까지 손상시켜 인지기능은 물론 인격까지 파탄 내며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 채 자신의 삶을 거짓으로 채워나가는 어리석음을 저지를 수 있다. 인간으로서 그 지경까지는 가지 말아야 할 텐데… 우리가 그토록 치매를 무서워하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자신 조차 모르는 상태가 무서워서가 아닐까? 같은 이치라면 만성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진짜 거짓말쟁이’가 되는 이병도 어찌 무섭지 않으랴. 문득 자문해 본다. 나에게 술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