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14. ‘나에게까지 돌아올 모과는 없다‘
등록일 2020-01-31
작성자 김근향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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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까지 돌아올 모과는 없다
자연의 초록에 안 어울리는 색은 없다.
같은 색이라도 인공의 색일 때에는 촌스러운 조합조차 자연 안에서는 말 그대로 자연-스럽다.
그 중에서도 베스트 궁합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초록과 노랑이다. 이 조합은 봄의 유채꽃이 베스트이다.
또 은행잎이 초록에서 점차 노랑으로 변해갈 때를 놓치지 않는다면 시간차가 있기는 하지만 가을에도 그 멋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초록과 노랑에 관한 나만의 베스트는 바로 초록 모과나무 잎과 노랑 모과나무 열매의 조합이다.
이 조합은 가을 아침 내 연구실 창가에서부터 시작해서 캠퍼스 곳곳에서 심심치 않게 즐길 수 있다.
처음엔 모든 풋 것이 그러하듯 모과 열매도 녹색 빛을 띤다. 비슷한 시기에 주황색 감 또한 매달리기 시작한다.
파아란 가을하늘과 주황색 감의 조합은 상상만으로도 기가 막힌다.
하지만 보통 교내에서는 감을 따서 먹지도 않기 때문에 감나무는 그저 조경으로 느껴져 의외로 감흥이 떨어진다.
역시 감은 시골집을 배경으로 해야 한다. 어쨌든. 모과는 초록일 때부터 기대를 준다.
잘 봐 두었다가 노랑이 되고 툭 떨어지면 잽싸게 집어 와야지 하고 찜을 해 두고 오가며 지켜본다.
모과나무 초록잎 사이사이로 노랗게 익어가는 모과가 반갑다. 바람이 살짝 스치면 모과차 냄새가 난다.
요즘은 가공물에서 원래의 냄새를 확인하게 된다더니 그렇다.
마치 메론보다 메로나의 맛이 더 메론 같은 느낌을 주듯이.
찜 해둔 모과를 나도 몇 개 주워서 자연 방향제로 연구실에 두어야지 하고 작심을 할 때쯤이면 이미 한 발 늦었다.
떨어져 있는 것 중에는 익어가다 못해 이미 썩어들어 가고 있는 것도 있다.
새나 짐승들이 모과를 먹는 지 잘 모르겠지만 그네들의 몫을 돌리고 나면 한두 개쯤은 내 차지가 되어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생각보다 딱 맞게 익은 흠집 없는 노란 모과를 얻기란 쉽지 않다.
어떤 해에는 떨어진 풋 모과를 주워 왔는데 노랗게 익어가는 것이 아니라 썪어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푸른 바나나가 노랗게 익어가는 것과는 다른 것이로구나.
우리 학과 교수님들의 연구실은 1층에 줄지어 있다 보니 창 밖으로 나무들이 바로 보인다.

감나무, 모과나무도 있고 심지어 바나나 나무도 있다.
지금은 퇴임하신 명예교수님께서 언젠가 씨를 뿌렸다든가 심었다든가 하셨다는데 우리 학교의 날씨가 열대기후 못지않기 때문인지 여름에는 잎이 무성해진다.
아직 바나나 열매는 보지 못했다.
각자 연구실 앞의 나무에 대한 지분은 연구실의 주인에게 있다는 불문율이 있다. 물론 법적 효력은 없다.
나는 옆 방 교수님과 감나무를 공유하고 있는데 내 지분은 양보하련다.
모과나무였으면 양보하지 않겠지만.
그리고 노란 모과열매를 내 방에 모셔오지는 못하더라도 오가며 그 진한 향기를 즐기면 되지.
이 가을 아침 모과차 한 모금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