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12. ‘남의 밭에서 서리의 충동을 느끼다‘
등록일 2020-01-31
작성자 김근향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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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밭에서 서리의 충동을 느끼다
영광교회 가는 길에 밭이 주욱 늘어서 있다. 땅이 다 갈아엎어져 있던 봄은 기억이 나는데 그 사이에는 특별히 눈길을 주지 않아서인지 그 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잘 안나다.
그리고 한 번은 나도 밭을 한 뙈기 분양(각주)받아서 뭐라도 하나 심어볼까 하고 학교에 문의했더니 그 당시에는 벌써 신청과 선정이 끝났다고 했다.
사실 농사 기술도 없고 나는 그냥 들꽃 씨앗이나 확 뿌려서 신경 쓰지 않고 그때그때 피는 자연 그대로의 들꽃이나 거저 감상할 요량이었다.
어쨌든 다음 기회에. 그렇게 밭에는 관심을 끄고 있었다.
그런데 가을이 되니 그 밭이 눈을 꽉 잡아끈다. 거기 여러 가지 수확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흙이었던 그 땅에 그 덥던 이곳의 여름을 견딘 농부의 땀과 작물의 생명력의 산물인 것을 잘 안다.
빨갛게 익은 고추, 파, 보라와 흰 꽃이 피어 있는 걸 보니 땅에 묻혀 있을 도라지 등등.
오늘 저녁 밥상에 당장 올릴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 이럴 때 서리하고 싶은 거구나.
이 밭의 주인 농부도 분명 학교의 교직원일텐데 지나가다 만나면 파 한 뿌리 정도는 얻을 수 있겠지만
아무도 보이질 않는다. 내년에는 나도 게으른 들꽃 농장의 주인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