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관찰] ‘인사이드 아웃2‘ _ 슬픔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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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여, 안녕!
자신의 흡연에 대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변론으로도 유명한 프랑스 작가 프랑수와즈 사강(Francoise Sagan, 1935~2004)의 소설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책을 읽고도 생각 없이 제목의 ‘안녕’이라는 단어는 당연히 Bye 인줄 알고 있었다. 오랜 동안. 그런데 그 안녕은 Hi(Hello)였다. 프랑스 소설이니까 아마도 봉주르? 책의 정확한 제목은 ‘Bonjour Tristesse’이다[‘Tristesse’는 쇼팽의 그 유명한 에튀드 10-3, 이별의 노래로 알려진 곡의 부제임. 그러니까 슬픔을 뜻하는 곡임]. 지금 번역의 문제, 한국어의 중의성 등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어쨌든 오해에서 벗어나 정신 차리고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그럼 이제 안녕이 시작이라는 말인가? 비극의 예고까지는 아니지만 그 말이 맞다. 소설에서는 뭔가 불만스럽고 불안정한 사춘기 소녀가 성인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슬픔이라는 감정을 막연하게 맞이하게 된다. 아니 슬픔을 어렴풋이 느끼면서 소녀는 성인이 되어감을 예감한다. 그리고 소설은 끝이 난다. 청소년 또는 대학생 필독서로 유명한 이 소설은 사실 어느 정도 인생살이를 한 후에 읽는 것이 오히려 더 와 닿는 것 같다. 나는 그랬다.
▶‘슬픔이’를 닮았다고?
<인사이드 아웃> 1편을 보지 못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푸르딩딩한 색상(Blue)에서부터 온 몸으로 슬픔을 뿜어내는 ‘슬픔이(Sadness)’ 캐릭터에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게다가 지난 겨울 교육대학원 수업에서 내가 두꺼운 터틀넥을 입고 노안에 근시까지 심해져 안경을 쓰고 있었던 탓인지 한 학생이 ‘’교수님 완전 ‘슬픔이’ 닮았어요.”라고 한 말을 듣고는 낯선 ‘슬픔이’에게 급호감이 생겼다.
평소 ‘슬픔’이라는 단어와 나를 매치해 본 적이 없어서 어색했지만 어느 때보다 힘든 겨울을 지내고 있었는데 ‘역시 슬픔은 숨길 수 없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스승의 날 대학원 내 지도학생들은 롤링페이터에 ‘슬픔이’를 닮았지만 슬프지 않는 우리 교수님이라며 나를 위로해 주어서 마음이 풀렸다.
▶다시 만난 ‘슬픔이’
그 ‘슬픔이’을 영화 <인사이드 아웃2>에서 다시 만났다. 기본 감정 캐릭터(기쁨이, 슬픔이, 버럭이, 까칠이, 소심이) 외에 추가 감정 캐릭터(불안이, 당황이, 따분이, 부럽이)가 더해져 영화는 아주 흥미진진했다. 마치 소설 <슬픔이여! 안녕!>의 메시지를 스펙터클하게 다루는 느낌이었다. 다만 <인사이드 아웃2>이 애니메이션으로 관람 연령이 어린 아이에서부터 시작할 것이라 그런지 ‘적당히 희망을 주는 것을 잊지 않는’ 수준에서 해피 엔딩이었다는 점에서 달랐다.
아니면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늘 그렇듯 해피 엔딩 레퍼토리에 충실하였던 것일 수도 있다. 새드 엔딩의 대표인 원작<인어공주> 마저 해피 엔딩으로 바꿔 놓는 디즈니의 강박적 스타일의 해피 엔딩은 아니었고 기쁨 반, 슬픔 반으로 주인공의 미래가 불확실하게 다채로워질 것을 예고한다. 그래서 엔딩이 꽤 마음에 들었다.
영화는 중2 병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소녀가 사춘기의 불안정성을 어떻게 맞이하는지를 보여 준다. 영화평론가도 아니면서 이 영화를 보면서 자꾸 평론 비슷한 것(형식 말고 내용에 관해서)을 하고 싶어지는 이유는 이 영화가 심리학적 근거에 기반하여 ‘감정들’을 다루고 있고 그 과정에서 발달심리학적 지식과 심리치료 특히 인지행동치료의 원리 등을 잘 보여 주어 자꾸 얄팍함과 심오함 사이 어디쯤에 있을 내 심리학 지식을 드러내고 싶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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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에크만(Paul Ekman) 찾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인내심을 가지고 누가 자문을 했을까 하고 맨 마지막까지 기다렸는데 기대했던 대로 ‘폴 에크만’이 자막으로 나오는 것을 확인하며 내 짐작이 맞았음에 흐뭇해 했다. 사실 그 분(1934~ ) 아직 안 돌아가셨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그래도 ‘감정’ 특히 모든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는 6~7가지 기본 감정(정서)을 찾아낸 것으로 유명한 심리학의 대가이니 그를 리스펙한다.
그의 초기 연구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이들도 많지만 뭔가를 처음 발견하거나 만드는 것이 어려운 것에 비해 비판은 쉬운 법이니 그의 연구가 정서에 관한 다양한 후속 연구들로 이어질 수 있게 하였다는 점에서 하여간 그는 훌륭하다.
요즘 심리학 지식이 많이 발전하여 심리학개론 수준에서도 수정이 되어야 할 것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으니 심리학을 개론 수준에서 볼 경우에는 기념비적인 연구들과 업그레이드된 현재의 지식과는 다소 괴리가 있을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세상도 사람도 점점 복잡해지고 있어서 그럴 수 밖에 없기는 하다.
▶‘슬픔이’ 별명: 걱정이, 강박이
슬프고 항상 걱정이 많아서 분위기가 묵직한 슬픔이는 그만큼 신중하고 그만큼 꼼꼼하다. 그래서 실수가 적고 드러내지 않지만 혼자 다행이라고 안도한다. 간혹 ‘우울’을 슬픔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는데 공통점이 있지만 다른 정서이다. 슬픔에 빠진 사람이 우울해질 위험성이 있지만 슬픔은 우울과 달리 병리적인 속성은 없다. 폴 사강의 소설 이름도 <슬픔이여, 안녕> 아니던가. 누구나 살면서 슬픔을 겪기 마련이다.
‘기쁨이(Joy)’가 주연인 듯하다가 결국 결정적인 해결의 실마리는 ‘슬픔이’에 의해 풀어진다. 사실 슬픔이로서는 천성을 거슬러 정말정말 용기를 내어 행동한 것일 텐데 사랑하는 이를 위해 가끔 희생하는 모습이 슬픔 속에 숨겨진 또 다른 특성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냥 툭툭 털고 일어나라고, 다시 시작하라고 말하는 것은 쉽지만 그게 잘 안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냥 푹 슬픔에 잠겨 있다가 어느 날 더 이상 흘릴 눈물도 없고 불현듯 배가 고프다는 것을 느끼면 그들은 다시 시작하게 된다. 다만 이들을 기다려 주지 않는 세상이 야속할 뿐이다.
▶‘불안이’ 가 애처롭다.
현란한 첫 등장을 보고 나는 ‘들뜸이(Manic)’일 줄 알았다. 불안 캐릭터 치고는 너무 나대는 모습이 아니었나 싶다. 불안한 사람의 특징인 계획성, 강박사고와 강박행동(불안을 줄이려는 노력), 미래에 대한 걱정을 잘 보여 주었고 심지어 극심한 공포에 이르는 공황까지 보여 주는 ‘불안이’가 정말 애처로웠다. 흔히 말하는 빌런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자기 말대로 자신의 성격(불안)과 능력 안에서 잘 해 보려고 최선을 다한 것인데 말이다. 병리적으로 보면, 영화 속 ‘불안이’ 캐릭터는 전형적인 불안에 더하여 강박과 조증이 함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아님 불안 수준은 높지만 성격적으로 외향성(E)이 높은 편?
하지만 그런 ‘불안이’를 미워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불안이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제 딴에는 잘 해 보려고, 할 수 있는 게 이것 밖에 없어서 심지어 결과가 더 악화될지라도 말이다. 간혹 누군가가 자신의 시도 자체를 알아주기만 해도 우리 불안이들은 울컥할 것이다. 물론 대부분 그러한 심정을 몰라주니 항상 서운함을 많이 느끼게 된다. 요즘 미국에서는 불안을 확 줄여주는 약물로 인한 중독문제와 그로인한 사회문제가 심각하다고 한다. 약물은 노력 없이 불안이 바로 떨어지게 해 주니 정말 편하지만 남용의 위험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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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좋은 사람이야. Vs. 나는 부족한 사람이야.
주인공 라일리의 내적 목소리는 이렇게 말한다. 때로는 ‘나는 좋은 사람이야.’, 때로는 ‘나는 부족한 사람이야.’ 라고 말이다. 둘 중 한 목소리의 지배만을 받는 것은 사실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사람이 아직 미성숙한 상태, 즉 어린 아이일 때는 그러기 십상이다. 실제 그렇지 않더라도 그렇게 믿을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나가면서 점차 내 안에 그리고 내 모습에는 좋은 것과 싫은 것 모두가 공존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도 그렇지 않은 자신만의 세계에 사는 사람이 있다. 즉 모 아니면 도라는 식에, 자의식만 과잉된 그런 다 큰 어른들이 있다.
▶신념(belief)의 연못과 실줄기/물기둥(?), 말 된다.
라일리가 어떤 경험을 하게 되면 이것은 기억의 구슬이 되고 이렇게 만들어진 구슬들을 기억의 연못에 담그면 가느다란 실줄기인지 물기둥이 치솟는다. 이 기둥은 라일리의 생각, 즉 신념이다. 각 기둥들은 마치 DNA의 이중나선처럼 서로 꼬이면서 하나의 ‘자아(Self)’라는 형상물로 탄생한다.
이 형상물은 처음에는 좋은 것으로만 구성되어 매우 빛나는 크리스탈이었다가 ‘불안이’ 패거리가 본부를 점령하여 라일리를 압박하다가 결국 찔리면 아플 것 같은 삐죽삐죽 피뢰침 같은 것으로 바뀐다. 그러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두 개가 조화를 이룬 형상물, 즉 새로운 자아로 거듭난다.
여기서 심리학에서 말하는 인지모델, 자아형성 과정 등을 엿볼 수 있다. 경험(정서, 생각, 행동)은 기억으로, 기억들은 모여 하나의 신념(예: 나는 좋은 사람이야 또는 나는 부족한 사람이야)이 되고 이 신념들이 모여서 한 인간의 자아 상이 형성된다고나 할까. 그 과정에서 기억의 저편으로 보내져 억압되는 기억들도 물론 존재한다.
이와 같은 일련의 심리내적(intrapsychic) 과정들, 말로 설명하면 정말 추상적으로 흐르게 되어 지루한데 이 영화는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그 과정을 시각적으로 형상화시켜 주어 쉽게 이해가 된다. 그리고 이 모든 장치들(기억의 구슬, 신념의 연못과 실기둥, 기억의 저편 등) 심리학 지식의 차원에서 정말 말 된다.
▶기억의 이편 아닌 저편
1편의 ‘감정이들’이 쫓겨나 갇힌 곳이 등장한다. 바로 기억의 저편이다. 아마도 무의식을 보여주려고 한 것 같다. 항상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빙산 형태로 의식과 무의식을 설명하는 것에서 벗어나 새롭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참신한 아이디어였다. 그리고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곳에 ‘감정이들’이 갇혔다는 것이다.
억눌린 감정들 때문에 사람들은 제대로 느끼지도 표현하지도 못한 채 부자연스럽게 살아가게 된다. 뭐든지 다 꺼내주는 파우치를 갖고 있는 기억의 저편에 사는 낡은 녀석(낮은 해상도로 표현된 것으로 볼 때 과거의 산물인 듯)이 기쁨이의 물음에 ‘그게 바로 부정(Denial)이야.’라는 장면이 나온다. 캬. 자아의 방어기제까지 다루다니.
기쁨이는 처한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좋게만 보려고 하였다. 그걸 다른 말로는 긍정적이라고 하는데 무조건적인 긍정 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기쁨이는 늘 세상을 희망적으로 보지만 때로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현실부정일 때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름이 마음에 든다. 기억의 이편 아닌 저편.
▶숨길 수 없는 표정
라일리 삼총사에게 균열의 조짐은 두 친구의 표정에서 드러났다. 말과 달리 두 친구 눈 주의의 미간은 뭔가 개운치 않는 느낌으로 찡그려졌다. 라일리 또한 뭔지 모르지만 그것을 감지했고 어색한 순간들이 지속된다. 눈 주변의 근육은 그 수가 엄청나며 미세하게 움직이는데 사람의 의지대로 조정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입이 아닌 눈으로 웃는 것을 진정한 미소(뒤센 스마일)라고 할 정도로 눈은 진실을 드러낸다. 모임의 단체사진이나 억지로 찍게 한 스튜디오 촬영에서 억지미소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람들은 웃는 모습이 이쁘다고 하지만 사실 자연스럽게 웃음이 지어질 때는 동공은 작아지고 눈가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해지며 얼굴은 찌그러져 있다. 확인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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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감(identity) 혼란, 입구와 출구는 모두 친구?
너는 누구냐? 이에 대해 충분히 자신있게 답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사람은 일생에 걸쳐 자신의 정체를 찾아 여행한다고는 할까. 그런데 그 정체감이 여물어지는 과정에서 만나는 첫 고비가 사춘기이다. 간혹 자의식이 강한 어린 아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자신에 대해 의문을 품고 흔들리는 때가 청소년기이다.
그들은 몸의 급속한 생물학적 변화를 정신이 따라 주지 못해서 혼란을 겪는다. 확실한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혼란이 덜 할텐데 이 시기의 영혼들은 모두 불안정하다. 불링(bullying, 따돌림)을 당하거나 그 정도는 아니어도 영화 속 라일리처럼 믿었던 친구들과 소원해지기라도 하면 더욱 불안해진다. 하지만 그러한 혼란의 출구 또한 친구이다.
친구는 또 다른 자신이기 때문이며 친구를 보면서 위안을 얻고 안정감을 찾아 간다. 8개의 심리사회적 발달단계로 유명한 정신분석가인 에릭 에릭슨(Erick Erickson, 1902~1994)에 의하면, 청소년기 다음에 이어지는 성인기 초기는 친밀감 형성기이므로 자연스럽게 자아 정체감의 시기는 친구나 동료와의 관계에서 그 실마리가 풀어진다.
인간에 있어서 정체감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주고 연구한 위대한 심리학자 에릭슨도 자신의 친아버지가 누군인지 몰라 평생을 자신의 정체에 의문을 품었다고 하니 삶의 어느 시기에서든 종류가 무엇이든(자아 정체감, 직업 정체감, 성 정체감 등등) 정체감을 못 찾았다고 너무 괴로워하지 말자.
▶슬픈 ‘기쁨이’와 기쁜 ‘슬픔이’
우울증 환자라고 해도 24시간 내내 우울하지는 않다. 행복한 사람이라고 해도 24시간 내내 행복동하지는 않다. 그러한 의미에서 영화에서 감정 캐릭터의 이름은 지나친 과잉일반화이며 이로 인해 오해와 착각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 감정들은 라일리 내부에서 각자 맡은 바를 열심히 해 내고 있으니 모두 성실하다고 할 수는 있겠다.
영화 속에서 기쁨이도 슬퍼한다. 슬픔이도 기뻐한다. 잠깐이지만 슬픔이가 밝은 표정을 짓는 것을 볼 수 있다. 기쁨이가 완전 기쁨으로만 똘똘 뭉친 모습으로만 나왔다면 약간 재수 없었을 것 같다. 그런데 기쁨이가 의기소침해 할 때 기쁨이에게 급격하게 마음이 갔다. 마음이라는 것이 짖궂고 얄궂다. 완벽한 모습보다는 약간 찌질한 모습일 때 그 사람과의 거리가 좁혀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 같은데.
▶눈치 없지만 귀여운 ‘추억’ 할머니
중간중간 불쑥불쑥 문을 열고 나오려는 할머니가 등장한다. 푸근한 모습이 귀엽기까지 했다. ‘감정이’들이 아직은 나오실 때가 아니라며 라일라가 40,50 되어서나 나오시라고 하니 금새 그것을 수용하며 문을 닫고 들어간다. 10대인 라일리의 현재에서는 아직 때가 아니란다. 맞다. 지금 나오면 너무 애늙은이가 되지 않을까 싶다. 라일리는 그렇다 쳐도 지금 내 나이는 그 ‘추억’ 할머니가 문을 살짝 열고 빼꼼 얼굴을 내밀 때가 아닐까. 추억 할머니, 반갑긴 하지만 나에게도 조금 더 있다 오면 좋겠다.
▶‘슬픔’아, 또 보자(CU)!
기쁠 때 기쁘다고 말할 수 있게, 슬플 때 슬프다 말할 수 있게. 하나 더 추가하면 마음이 아플 때 아프다고 말할 수 있게… 그러기를 바란다. 요즘 여러가지 이유로 마음 아픈 사람들이 많다. 슬픈 일도 많다. 마음이 아픈 상태와 슬픔이 지나쳐 우울에까지 이른 힘든 감정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닌데도 우리는 그것을 잘 드러내지 못하고 또 남의 그것을 모르는 채 지나가곤 한다. 이런 세상에 비록 하나의 감정이지만 각자 맡은 정체성에 맞게 제 감정을 온몸으로 성실하게 보여준 ‘감정이들’이 고맙다.
감정 본부의 원년 멤버(기쁨이, 슬픔이, 버럭이, 까칠이, 소심이)와 새 멤버(불안이, 당황이, 따분이, 부럽이) 그리고 그 외 게스트들을 만나서 반가웠다.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이 현실에서는 매우 복잡하고 미묘하겠지만 ‘오늘은 소심이가 활동을 많이 하는구나, 어제는 버럭이가 갑자기 끼어들더니만 불안이 녀석 또 꿈틀거리네…’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면 다소 부담스러운 감정을 품기도 또 드러내기도 조금은 수월하지 않을까 싶다. 그럼, 슬픔아, 이런 안녕(Hi)도 또 이런 안녕(Bye)도 하지 말고 우리 다시 만나자(See You Later).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