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관찰] 요즘 우리는 너무 쉽게 진단명을 붙인다
[출처 : 그냥쌤의 심리학이야기 ]◁ 원문을 보려면 여기를 클릭
요즘은 누군가와 갈등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렵지 않게 이런 말을 듣는다.
"그 사람 완전 나르시시스트야."
"가스라이팅 당한 것 같은데."
"사이코패스 아니야?"
예전 같으면 "성격이 좀 독특하네", "참 자기중심적이네" 정도로 지나갔을 말들이 이제는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의 용어로 곧바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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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실제로 그런 특성을 가진 사람도 있고 치료와 도움이 필요한 경우도 분명 존재한다. 내가 불편했던 것은 그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사람을 이해하기 전에 너무 빨리 진단명부터 붙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터넷이나 숏폼을 보다 보면 세상은 나르시시스트와 사이코패스로 가득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 연구를 들여다보면 풍경은 조금 다르다.
엄격한 진단 기준을 적용했을 때 자기애성 성격장애나 반사회성 성격장애(이 중 일부가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는 흔한 질환이 아니다.
유병률 추정치는 연구마다 편차가 커서 낮게는 1% 미만, 높게는 6%대까지 다양하게 보고된다. ADHD 유병률 역시 우리가 일상에서 체감하는 것과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체감은 현실과 이렇게 다를까.
심리학자 닉 해슬럼(Nick Haslam)은 이를 '개념 인플레이션(Concept Creep)'이라고 설명한다. 원래는 제한된 의미로 사용되던 심리학과 정신의학의 개념이 점차 더 넓은 일상의 경험까지 확장되는 현상이다.
이 변화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예전에는 설명되지 못했던 고통에 이름이 붙었고 그만큼 더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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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문적인 진단명이 일상의 갈등을 설명(심지어 왜곡)하는 가장 손쉬운 언어가 되어 가는 병폐도 나타난다.
사실 내가 이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바로 그 지점 때문이었다.
최근 읽은 임상심리학자 이자벨 몰리의 《그건 가스라이팅이 아니다》 역시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 책은 가스라이팅이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말 필요한 개념이기 때문에 더욱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모든 갈등이 가스라이팅은 아니다. 모든 이기적인 사람이 나르시시스트도 아니다.
특히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진단명을 붙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맥락을 필요로 한다.
읽는 내내 '내가 막연하게 느끼던 불편함이 바로 이것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각종 정신장애 진단과 그것의 오용을 자신의 풍부한 임상 경험(그는 정서중심 커플 치료를 주로 하고 있음)을 바탕으로 조목조목 나열하며 심리학 용어 사용의 아이러니한 결과를 꼬집는다.
즉 심리학 용어가 일상의 비유처럼 소비될수록 정작 실제 질환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현실은 오히려 보이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누군가가 "나 ADHD인가 봐."라고 가볍게 말하는 동안, 실제 ADHD로 학업과 직장, 대인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삶은 "누구나 조금씩 그런 거 아니야?"라는 말 속에 희미해질 수 있다.
'나르시시스트', '사이코패스', '경계선 성격장애'도 마찬가지다.
진단명이 흔해질수록 그 진단이 정말 필요한 사람들은 오히려 더 큰 낙인과 오해를 감당해야 하는 아이러니가 생긴다.
심리학은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언어다. 그래서 심리학의 언어는 사람을 더 세밀하게 이해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언어는 사람을 성급하게 분류하고 낙인 찍는 데 과도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단명은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일 수는 있다. 하지만 한 사람 자체를 대신할 수는 없다.
나는 임상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수많은 진단명을 배웠다. 그럴수록 오히려 조심하게 된다.
진단이란 단순히 이름 하나를 붙이는 일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과 맥락을 오래 들여다본 끝에 내리는 매우 신중한 판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진단명은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이름만으로는 그 사람의 삶도, 관계도, 변화의 가능성도 설명할 수 없다.
진단명이 곧 그 '사람'은 아니다.
참고문헌
Haslam, N. (2016). Concept creep: Psychology's expanding concepts of harm and pathology. Psychological Inquiry, 27(1), 1-17.
Morley, I. (2026). 그건 가스라이팅이 아니다 (문가람 역). 글항아리. (원서 출판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