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관찰]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속 ‘기 빨리는’ 심리학 : 시끄러운 외로움과 조용한 싱크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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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JTBC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일명 ‘모자무싸’)를 정주행했다. 잘난 친구들 사이에서 뒤처진 채 자신의 무가치감과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상처 입은 사람들이 서로를 보듬으며 살아남는 이야기였다.
마지막 회의 해피엔딩 장면에서는 괜히 안도감 같은 것도 들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따뜻하게 끝난 이야기인데 화면을 끄고 난 뒤의 마음은 묘하게 무거웠다. 재미있게 봤는데도 어딘가 기운이 빠진 느낌. 마치 아주 긴 감정노동을 하고 나온 것 같은 피로감이 남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건 드라마 속 인물들의 감정선에 내 마음이 깊이 동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정서 전염(Emotional Contagion)’이라고 부른다. 사람의 감정은 생각보다 쉽게 옮겨 붙는다.
특히 강한 정서를 가진 사람 곁에 오래 머물면 내 신경계 역시 그 리듬에 조금씩 동조하게 된다. 이 드라마에는 유독 나를 피곤하게 만들었던 두 인물이 있었다. 둘 다 외로운 사람들인데 외로움을 표현하는 방식은 정반대였다.

요동치는 감정 워치
그리고 그 차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은 개념 하나를 떠올렸다. 바로 감정의 ‘방향’과 ‘강도’다. 정서에도 온도와 진폭이 있다. 우리는 보통 감정을 좋다, 나쁘다의 문제로만 생각한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 “우울해 보인다” 같은 식이다.
하지만 감정을 이해할 때 두 개의 축을 함께 보면 휠씬 이해의 폭이 넖어진다. 하나는 감정의 방향이다.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각성도(arousal), 즉 감정의 강도다. 그 사람이 얼마나 쉽게 흥분하고, 요동치고 에너지를 분출하는 상태인가를 뜻한다.
이 두 축으로 사람들을 보다 보면 재미있는 생각이 떠오른다. 사람마다 타고난 ‘정서의 하드웨어’가 어느 정도 다르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은 작은 자극에도 금세 흥분하고 말이 많아진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웬만한 상황에서도 조용하고 에너지를 안으로 가라앉힌다. 이런 부분은 비교적 잘 변하지 않는다. 일종의 기질이나 성향이다.
반면 현재, 지금 당장의 감정 상태는 조금 다르다. 상황에 따라 계속 업데이트되는 소프트웨어에 가깝다. 불안, 분노, 낙담, 희망 같은 것들 말이다. 이 드라마 속 두 인물은 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조합이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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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만 : 시끄러운 외로움
구교환 배우가 연기한 황동만은 늘 에너지가 넘친다. 말이 많고 남의 일에 쉽게 끼어들고 분위기를 휘젓는다. 때로는 과하게 낭만적이고 또 과하게 급발진한다. 처음엔 재미있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런데 몇 회를 보다 보면 조금 지친다. 왜일까.
그는 기본적으로 ‘고각성’의 하드웨어를 가진 사람처럼 보인다. 에너지가 바깥으로 계속 분출되는 유형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에너지 아래에 오랜 실패와 두려움, 자기연민 같은 부정 정서가 깔려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계속 떠들고 설명하고 합리화한다. 마치 멈추는 순간 무너질 것처럼. 이런 사람 곁에 오래 있으면 주변 사람들은 이상하게 피곤해진다. 악의가 없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정서적 소음을 발생하게 하 때문이다.
가끔 만나는 친구라면 유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상 가까이에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내 신경계가 계속 그 사람의 진폭에 맞춰 흔들리게 된다. 우리가 흔히 “기 빨린다”고 표현하는 경험 중 일부는 어쩌면 이런 감각 과부하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변은아 : 조용한 싱크홀
반대로 고윤정 배우가 연기한 변은아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그녀는 늘 가라앉아 있다. 대답은 늦고 표정은 어둡고 마음은 쉽게 닫힌다. 타인과 가까워지는 순간 오히려 더 멀어지는 사람 같다.
황동만이 소음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변은아는 침묵으로 주변 공기를 가라앉히는 사람에 가깝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저각성’ 기질처럼 보인다. 에너지를 밖으로 분출하기보다 안쪽으로 응축하는 유형이다. 그런데 그 위에 그녀만의 사연, 즉 유기 불안과 상처라는 부정 정서가 오래 깔려 있다.
그래서 그녀 주변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무거움이 생긴다. 흥미로운 점은 사람들은 시끄러운 사람은 금방 경계하면서도 이런 유형은 의외로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조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런 ‘저각성-부정’ 상태의 사람 곁에서도 우리는 서서히 에너지를 소모한다. 마치 밝은 방 안의 산소가 조금씩 줄어드는 것처럼. 별 반응이 없고 괜히 늘 가라앉아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기 힘든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려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 마음의 배터리를 지키는 일
드라마는 극적이다. 그래서 ‘시끄러운 외로움’과 ‘고요한 외로움’을 서로 붙여놓고 결국 서로를 이해하게 만든다. 화면 속에서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하지만 현실의 인간관계는 조금 다르다.
누군가의 상처를 이해하는 것과 그 사람의 감정 진폭에 매일 휘말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계속 남 탓을 하거나 매번 동굴 속으로 숨어버리는 사람 곁에 오래 있다 보면 내 마음의 배터리가 먼저 방전될 수도 있다.
그래서 때로는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 “저 사람은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보다 먼저 “저 사람의 기본 하드웨어는 어떤 타입일까?” “그리고 지금 어떤 소프트웨어가 돌아가고 있을까?”
이렇게 조금 떨어져 바라보면, 우리는 타인의 감정에 무조건 휩쓸리지 않고 관계를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심리적 거리두기(boundary setting)는 냉정함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를 오래 지켜보기 위해 필요한 안전거리 같은 것이다.
오늘 밤, 내 마음 워치의 배터리는 어떤 상태일까.
참고한 심리학 키워드들
Russell, J. A. (1980). A circumplex model of affect(러셀의 정서 윈형 모델)
Emotional Contagion(감정 전염)
Arousal & Valence Model(각성도와 정서 방향)
Temperament(기질)
※ 본 글은 드라마 감상을 바탕으로 심리학적 개념을 개인적으로 해석한 글입니다.